- 6~8세기 新羅 都城의 都市計劃과 陵墓域의 변천 연구
- ㆍ 저자명
- 황인호(Inho Hwang)
- ㆍ 간행물명
- 한국고고학보KCI
- ㆍ 권/호정보
- 2016년|101권 (통권101호)|pp.208-235 (28 pages)
- ㆍ 발행정보
- 한국고고학회|한국
- ㆍ 파일정보
- 정기간행물|KOR| PDF텍스트(5.14MB)
- ㆍ 주제분야
- 인문학
신라는 6세기 중엽 진흥왕 때부터 月城을 중심으로 한 경주분지 내에 坊里制를 기초로 한 도시계획을 추진하였다. 정연한 도로망을 갖춘 광역의 시가지를 개발하고 皇龍寺와 같은 대규모 사찰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부지의 확보가 전제되어야 한다. 6세기 초 마립간시기까지 월성 북편에 집중되었던 적석목곽분이 석실분으로 대체되면서 王京의 서쪽 외곽인 선도산 자락으로 陵墓域이 이전된 것도 왕경의 도시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가장 먼저 서악동고분군을 장지로 선택한 배경은 왕경의 서쪽을 방어하고 달구벌 방면으로 통하는 간선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선도산 일대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통일기 이전의 7세기 왕릉들은 1차 도시계획이 시행된 왕경 중심부의 사방 경계에 조성된 특징이 있으며, 집단묘역을 이루는 석실분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걸쳐 보다 외곽의 구릉지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통일 이후 8세기 초까지 왕릉은 2차 도시계획의 범위에 맞춰 왕경의 남동쪽 외곽인 명활산 자락에 집중되었다. 특히 이곳은 울산 방면으로 통하는 간선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길목에 해당한다. 8세기 이후 왕경의 최종 확장과 더불어 왕릉은 보다 외곽 쪽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도시공간으로 개발된 북천이북에서는 도시구획의 중심축이 진북인 것과 지형에 따라 기울어진 2가지 방식이 공존하는데, 구간에 따라 중심축의 방향은 달라져도 방리 구조나 규모는 동일한 것으로 최근 발굴 결과 밝혀졌다.
신라는 6세기 중엽 진흥왕 때부터 月城을 중심으로 한 경주분지 내에 坊里制를 기초로 한 도시계획을 추진하였다. 정연한 도로망을 갖춘 광역의 시가지를 개발하고 皇龍寺와 같은 대규모 사찰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부지의 확보가 전제되어야 한다. 6세기 초 마립간시기까지 월성 북편에 집중되었던 적석목곽분이 석실분으로 대체되면서 王京의 서쪽 외곽인 선도산 자락으로 陵墓域이 이전된 것도 왕경의 도시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가장 먼저 서악동고분군을 장지로 선택한 배경은 왕경의 서쪽을 방어하고 달구벌 방면으로 통하는 간선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선도산 일대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통일기 이전의 7세기 왕릉들은 1차 도시계획이 시행된 왕경 중심부의 사방 경계에 조성된 특징이 있으며, 집단묘역을 이루는 석실분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걸쳐 보다 외곽의 구릉지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통일 이후 8세기 초까지 왕릉은 2차 도시계획의 범위에 맞춰 왕경의 남동쪽 외곽인 명활산 자락에 집중되었다. 특히 이곳은 울산 방면으로 통하는 간선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길목에 해당한다. 8세기 이후 왕경의 최종 확장과 더불어 왕릉은 보다 외곽 쪽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도시공간으로 개발된 북천이북에서는 도시구획의 중심축이 진북인 것과 지형에 따라 기울어진 2가지 방식이 공존하는데, 구간에 따라 중심축의 방향은 달라져도 방리 구조나 규모는 동일한 것으로 최근 발굴 결과 밝혀졌다.
Ⅰ. 머리말 Ⅱ. 中古期 왕경 개편과 봉토석실분의 조영 Ⅲ. 中代 왕경 확장과 왕릉의 분포 Ⅳ. 북천 이북의 집단묘역 조성과 시가지 구획 Ⅴ.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