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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동해 침투와 죽변지역 일본인 살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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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동해 침투와 죽변지역 일본인 살해사건
  • Japanese Infiltration of East Sea and People’s Resistance at Jukbyeon
저자명
한철호
간행물명
동국사학KCI
권/호정보
2013년|54권 (통권54호)|pp.173-213 (41 pages)
발행정보
동국역사문화연구소|한국
파일정보
정기간행물|KOR|
PDF텍스트(2.18MB)
주제분야
교육학
서지반출

국문초록

경상북도 울진군의 죽변은 울릉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으며, 동해안의 중요한 良港이자 어류도 풍부한 어장이었다. 이러한 지리적?자연적 조건 때문에 죽변은 개항 후에도 일본의 침투 근거지로 손꼽혀왔다. 이에 조선인은 일본 어민과 충돌하면서 저항하였다. 이에 본고는 아관파천 전후 최대의 일본인 살해사건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1896년 3월 죽변사건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 의의를 살펴보았다. 일본은 개항 직후인 1878년부터 동해에서 개항장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측량을 실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1880년 5월 아마기호가 죽변을 최초로 조사하였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환영수로지?와 ?조선수로지?에 실렸고, 죽변만약측도 도 발간되었다. 1899년 9월 마야호는 울릉도를 조사한뒤 울릉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죽변이라고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905년 2월 일본의 독도 강점 당시, 기모쓰키에 의해 무주지선점의 근거들 중 하나로 악용되었다. 1880년 원산 개항 후도 서일본 지방에서 동해까지 거리는 너무 멀어 소형어선으로 조업하기가 곤란했고, 동해에 적당한 항구가 적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890년대에 들어 죽변이 큰배를 정박할 수 있는 항만이며 어류가 풍부하다는 사실이 점차 퍼지면서 일본어민이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생계를 위협받은 죽변인의 반일감정이 고조되었다. 아관파천 전후 전국에서 반일운동이 극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강원도에서도 1895년 12월부터 강릉의병이 봉기하였다. 1896년 3월 2일 강릉의병이 원산으로 떠난 직후인 3월 13일 강릉의병과 합세한 죽변인이 일본어민 24명을 습격해 15명을 살해한 죽변사건이 일어났다. 죽변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일본은 군함을 급히 파견해 조사하였다. 죽변사건은 강릉의병이 원산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전력 배치에 혼선을 야기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 죽변사건을 포함해 일본인의 피살 등을 강력하게 항의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민비살해사건의 심문 및 추궁 등 난관에 봉착한 일본은 5월 30일 일본인 62명의 인명피해 배상금을 지불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여기에는 죽변사건의 피살자와 부상자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1897년 7월 말 재산상의 손해배상금을 조선에 추가로 요청했을 때 죽변사건의 피해액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배상금을 최소한으로 요구한다는 방침에 따라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죽변사건이 제외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아무런 답변을 주지 않았다. 일본도 민비살해사건이 발목을 잡은 탓인지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1901년 12월 일본은 죽변사건의 피살자 가족이 보내온 당시의 사진 3장을 제시하면서 배상금문제를 조속히 타결하자고 독촉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은 손해배상건을 한국정부의 책임 문제로 교섭하기보다 고종의 단독 의사에 호소하는 방식을 추진하였다.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았던 1905년 1월 일본은 고종에게 정부 재정 혹은 내탕금에서 지불해달라고 요구해 동의를 얻어냈다. 그 결과 1월 30일 고종이 내탕금 18만여 원을 지불한다는 조서를 반포함으로써 죽변사건을 포함한 손해배상 문제는 9년만에 비로소 타결되었다. 그 과정에서 죽변사건은 일본이 한국을 추궁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영문초록

Jukbyeon, an affluent port at Uljin County, North Gyeongsang Province, in the East Sea coast is the closest point to Ulleungdo. The natural and geographic features made this port counted as a main infiltration point for Japanese people after the opening of ports. But conflict occurred between Chosun people and Japanese fishermen. This article looks into the cause, process, and meanings of Jukbyeon Incident of March 1896, which is not widely known in spite of its importance. Japanese government surveyed the East Sea coast searching for a proper port for opening from 1878. The Ship Amagi made a first survey of Jukbyeon in May 1880. The survey report was carried in Hwanyeoong-suroji and Chosun-suroji, and Jukbyeonman-yakcheukdo was also published. The Ship Maya recognized Jukbyeon as the closest point to Ulleungdo after surveying the island. Kimotsuki made an ill use of it in justifying terra nullius argument when Japan usurped Dokdo in February 1905. Even after the opening of Wonsan, it was hard for small ships to make a long voyage from West Japan to the East Sea coast. It was known in 1890s that big ships can anchor at Jukbyeon port and that fisheries are affluent. Then Japanese fishermen began to infiltrate into the area. This infiltration aggravated the life of Jukbyeon people and their anti-Japanese feelings increased. When anti-Japanese movement was spreading throughout the country around the Korea Royal Refuge at the Russian Legation, righteous army rose up at Gangneung in Gangwon Province in late 1895. On March 13, 1896, the people at Jukbyeon in alliance with Gangneung righteous army attacked 24 Japanese fishermen, killing 15 of them. Japanese government dispatched a warship for the investigation of the incident. This incident caused a confusion in the deployment of Japanese forces against the Gangneung righteous army moving toward Wonsan. Japanese government lodged a strong protest against the incident. But facing the pressing demand for the account about the slaying of Empress Min, Japan claimed damages for 52 Japanese victims. The damages included those for the Japanese who were killed and wounded at the Jukbyeon Incident. When Japan claimed additional property damages in July 1897, however, the damages for Jukbyeon Incident were not included. It seems that this incident was excluded following the policy of minimizing the amount of claims. But Korean government did not respond to the demand. Thus Japanese government changed its plan by asking for Emperor Gojong’s decision instead of negotiating with Korean government. In 1905, Japan appealed to Gojong and got his approval to make payment be made from government finance or royal finance. The compensation for damage, including that for the Jukbyeon Incident, finally came to a settlement when Emperor Gojong proclaimed an Imperial edict to pay 180 thousand odd won from the royal finance on January 30, 1905. The Jukbyeon Incident was exploited as an important ground by Japan in calling Korea to account.

목차

Ⅰ. 머리말
Ⅱ. 일본의 동해 침투와 죽변
1. 동해 측량 실태
2. 동해 어업 침투
Ⅲ. 1896년 죽변지역 일본인 살해사건과 처리과정
1. 아관파천 전후 동해지역의 반일운동과 죽변사건
2. 죽변사건의 처리과정과 그 의미
Ⅳ. 맺음말

참고문헌 (19건)

  • ⌈肅宗實錄⌋
  • ⌈水路雜誌⌋
  • ⌈近代日鮮關係の硏究⌋上
  • ⌈寰瀛水路誌⌋
  • ⌈朝鮮沿岸諸錯地⌋
  • ⌈朝鮮通漁事情⌋
  • ⌈大日本水産會報報⌋
  •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편, ⌈舊韓國外交文書: 일안⌋3, 고려대학교출판부, 1967.
  • 국사편찬위원회 편, ⌈駐韓日本公使館記錄⌋13, 1993.
  • 김경태, ⌈한국근대경제사연구⌋, 창작과비평사, 1994.
  • 김수희, ⌈근대 일본어민의 한국진출과 어업경영⌋, 경인문화사, 2010.
  •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아카데미, 1998.
  • 송병기, ⌈울릉도와 독도, 그 역사적 검증⌋, 역사공간, 2010.
  • 이근우 등 번역, ⌈100년 전 일본인이 본 우리의 바다 한국수산지⌋1-1, 새미, 2010.
  • 외무성 경찰사, ⌈韓國警察史⌋2, 고려서점, 1989.
  • 장수호, ⌈조선시대 말 일본의 어업 침탈사⌋, 블루앤노트, 2011.
  • 다카사키 소지, 이규수 옮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역사비평사, 2006.
  • 이영학, ⌈개항 이후 일제의 어업 침투와 조선 어민의 대응⌋, ⌈역사와현실⌋18, 1995.
  • 한철호, ⌈갑오개혁․아관파천기(1894~1897) 일본의 치외법권 행사와 조선의 대응 , ⌈한국민족운동사연구⌋5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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