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회원 [로그인]
소속기관에서 받은 아이디,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
개인회원 [로그인]

비회원 구매시 입력하신 핸드폰번호를 입력해 주세요.
본인 인증 후 구매내역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회원가입
서지반출
고려 말 정치·권력구조의 한 측면 -위화도 회군 이후 창왕대 정국에서의 황제권 작용 양상을 중심으로-
[STEP1]서지반출 형식 선택
파일형식
@
서지도구
SNS
기타
[STEP2]서지반출 정보 선택
  • 제목
  • URL
돌아가기
확인
취소
  • 고려 말 정치·권력구조의 한 측면 -위화도 회군 이후 창왕대 정국에서의 황제권 작용 양상을 중심으로-
  • An aspect of political and power structure at the end of Goryeo dynasty
저자명
이명미
간행물명
동국사학KCI
권/호정보
2015년|58권 (통권58호)|pp.81-116 (36 pages)
발행정보
동국역사문화연구소|한국
파일정보
정기간행물|KOR|
PDF텍스트(1.2MB)
주제분야
교육학
서지반출

국문초록

이 논문은 1388년 위화도 회군과 그에 이어지는 우왕 ‘선위’ 및 창왕 옹립, 그리고 창왕 폐위에 이르는 일련의 정쟁 과정에서 황제권이 작용하 는 양상을 통해 고려 말 정치·권력구조의 한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시작되는 조선 건국 과정은 이성계를 중 심으로 한 무장세력의 군사력이 일차적인 기반이 되었지만 그 과정은 정치 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조선 건국의 또다른 주체인 신흥유신들 이 개혁의 방향성을 두고 분기해 가는 과정이었다. 회군세력이 우왕을 ‘폐 위’시키지 않고 事大의 예를 거스른 요동 정벌 결정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선위’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逆行에 면죄부를 받았던 것은 이 과정에서 황제권이 회군세력의 권력을 밑받침하는 명분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회군세력의 권력이 황제권을 명분으로 삼게 된 상황은 고려 내의 권력 과 황제권이 사실상 단절되어 있던 고려전기의 상황과 차별성을 갖는 한편 으로, 황제와의 직접적 관계에 따라 실질적인 권력이 부여되었던 몽골 복 속기의 상황과는 단절과 연결의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이에 창왕 즉위 후에는 그러한 ‘명분’을 내외적으로 확인받기 위한 과정에서 국왕의 친조 나 황제가 파견한 관리에 의한 국정 감독을 요청하거나, 고려 신료들이 황 제에게 직접 반대세력을 고발하고 이에 대해 칙사의 파견과 조사를 요청하 는 등 정치와 외교의 경계가 흐려져 있던 몽골과의 관계에서 일상화한 정치·외교 방식이 활용되기도 했다. 한편, 명과 직결되어 있던 회군의 명분이 명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운데, 회군세력은 또다른 명분이자 권위로서 고려왕실의 권위를 가져왔 다.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증명하기 어려운 주장의 ‘진실성’ 을 담보해줄 수 있는 권위로서 회군세력은 명 황제의 권위를 빌어 왔으며, 이는 이후 ‘폐가입진’이라는 논리로 전용되면서 회군의 정당성에, 우· 창 폐위 및 처형, 나아가 회군 세력과 대립했던 정치세력들을 숙청하는 과 정에서 중요한 명분으로서 해석되고 활용되었다.

영문초록

This study set out to investigate an aspect of political and power structure at the end of Goryeo through the working patterns of imperial power in the process from the Wihwado Retreat in 1388 through the “abdication” of King Woo to the enthroning and dethronement of King Chang. The founding process of Joseon, which began with the Wihwado Retreat in 1388, had its primary base in the military power of armed forces around Lee Seong-gye, but the process was working in a political way. The retreat forces “abdicated” King Woo instead of “dethroning” him as a gesture of reflecting upon the Liaodong conquest decision that went against the courtesy of sycophancy and thus received indulgence for their “retrogression,” which suggests that the imperial power supported the power of the retreat forces at that time. The situation of the retreat forces taking imperial power as their cause is differentiated from the situation of actual separation between the power within Goryeo and the imperial power in the former half of Goryeo and has both a severance and connection aspect from the subjugation period to Mongolia when practical power was granted according to direct relations with the emperor. Such a situation allowed for the utilization of routine political and diplomatic methods in relationships with Mongolia in which the line between politics and diplomacy was blurry as King Chang ruled the nation himself or requested the supervision of state affairs by an official dispatched by the emperor to have his “cause” confirmed both internally and externally or the subjects of Goryeo reported the opposing party to the emperor themselves and requested the dispatch and investigation of a royal messenger. Since the cause of the retreat was not recognized by Ming, they brought the authority of Goryeo’s royal family as another cause and authority. It was the discussion that Both King Woo and King Chang did not come from the Wang family. The retreat forces borrowed the authority of the Ming emperor as the authority to guarantee the “truth” of the argument that was abruptly raised and very likely to have been fabricated. It was later appropriated as the logic of “Pyegaipjin(廢假立 眞)” and interpreted and utilized as a very critical cause in the process of securing the legitimacy of the retreat, dethronement and execution of Kings Woo and Chang, and further purge of the political forces in opposition to the retreat forces.

목차

Ⅰ. 머리말
Ⅱ. 우왕 선위와 창왕 옹립의 내외적 배경
Ⅲ. 창왕대 국왕 친조·감국 요청과 명분의 전환:
명분적 권위로서의 황제권
Ⅳ. 맺음말

참고문헌 (21건)

  • 김순자, 『한국 중세 한중관계사』, 혜안, 2007.
  • 도현철, 『고려말 사대부의 정치사상연구』, 일조각, 1999.
  • 도현철, 『목은 이색의 정치사상 연구』, 혜안, 2011.
  • 심재석, 『高麗國王冊封硏究』, 2001, 혜안. 李相佰, 『李朝建國의 硏究』, 을유문화사, 1949.
  • 이익주, 『이색의 삶과 생각』, 일조각, 2013.
  • 홍영의, 『高麗末 政治史 硏究』, 혜안, 2005.
  • 강지언, 「威化島 回軍과 그 推進勢力에 대한 검토」, 『梨花史學硏究』 제 20·21合輯, 1993.
  • 김당택, 「李成桂의 威化島回軍과 制度改革」, 『역사학연구(전남사학)』 24, 2005.
  • 김영수, 「위화도회군의 정치: 최영ㆍ이성계의 요동공벌 정쟁과 이색ㆍ이 성계의 정치개혁ㆍ정통성 논쟁」, 『한국정치학회보』 제33집 제1호, 1999.
  • 박천식, 「戊辰回軍功臣의 冊封顚末과 그 性格」, 『全北史學』 3, 1979.
  • 신호웅, 「공민왕대 신돈의 개혁정치와 우창비왕설」, 『이화사학연구』 30, 2003.
  • 유경아, 「고려말 정몽주 동조 세력의 형성과 활동」, 『이화사학연구』 25·26집, 1999.
  • 유창규, 「李成桂의 軍事的 基盤: 東北面을 중심으로」, 『진단학보』 제58 호, 1984.
  • 유창규, 「高麗末 崔瑩勢力의 형성과 遼東攻略」, 『歷史學報』 143, 1994. 尹斗守, 「禑昌非王說의 硏究」, 『考古歷史學志』 5·6 合集, 1990.
  • 이명미, 「고려-몽골 관계와 고려국왕 위상의 변화」, 서울대학교 국사학 과 박사학위논문, 2012.
  • 이우성, 「牧隱에게 있어서 禑昌問題 및 田制問題」, 『목은 이색의 생애와 사상』 , 일조각, 1996.
  • 이익주, 「高麗·元 관계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대학교 국사 학과 박사학위논문, 1996.
  • 이익주, 「고려말 신흥유신의 성장과 조선건국」, 『역사와 현실』 29, 1998.
  • 조계찬, 「朝鮮建國과 尹彛·李初事件」, 『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 史學論叢』 , 지식산업사, 1987.
  • 최종석, 「조선초기 국가 위상과 ‘聖敎自由’」, 『한국사연구』 162, 2013.
  • 허흥식, 「高麗末 李成桂(1335∼1408)의 세력기반」, 『歷史와 人間의 對 應-高柄翊先生 回甲紀念 史學論叢』 , 1984.
구매하기 (6,500)
추천 연관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