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찰
- ㆍ 저자명
- 오영교
- ㆍ 간행물명
- 한국대학박물관협회 학술대회지
- ㆍ 권/호정보
- 2014년|71권 (통권37호)|pp.11-23 (13 pages)
- ㆍ 발행정보
- 한국대학박물관협회|한국
- ㆍ 파일정보
- 학술대회지|KOR| PDF텍스트(0.48MB)
- ㆍ 주제분야
- 인문학
원주는 국가사에 의한 편년 구분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2014년은 강원 정도 619주년, 북원경 설정 1336년이 되는 해이다. 원주는 통일신라시대 6소경의 하나인 북원경이, 조선시대에는 500년 동안 지방제도 에서 가장 중요한 강원감영이 소재한 곳이다. 전통시대 원주는 중앙지역과 한반도 동남부 지역과의 문화교류의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남한강의 수로와 여주·양평으로 연결되는 육로의 발달로 서울과의 통교가 손쉬운 교통상의 이점이 있었다. 이로 인해 서울과 가까워서 토성(土姓) 세력들이 본관의 토착적 기반을 유지하면서 상경종사(上京從仕)하기에 편리하였고, 비토성 (非土姓) 사대부들에 의한 입거(入居)·낙향(落鄕)이 잦은 지역이었다.1) 원주는 한말 지방제도의 일환으로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와 1896년(건양 1) 13도제(道制)를 실시할 때 감영이 폐쇄되었다. 1952년 원주에 피난도정이 잠시 운영되다가 춘천으로 재차 간판이 옮겨진 후 더 이상 강원도의 중심도시로서 언급되지 못하였다. 1953년 이후 1군사령부와 예하 부대의 집중적인 주둔으로 군사도시라는 지역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시가지를 관통하여 백운산과 치악산을 연결하는 군사도로가 개설되고 A·B·C 도로로 명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주의 역사와 전통이 끼여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었다. 원일로·중앙로·평원로라는 명칭을 되찾은 것은 지방자치가 시행된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행정·문화·정치·경제의 중심지로서 온갖 영화와 번성을 누렸을 조선 500년 관동(關東) 수부(首府)도시로서의 흔적인 감영을 볼 때, 추상 같은 권위의 상징이어야 할 감영의 실질적인 위상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은 채 몇 개의 작은 건물로만 남아 있다.
Ⅰ. 서언 Ⅱ. 원주의 선사문화와 역사 Ⅲ. 원주문화의 형성과 특질 Ⅳ. 역사도시 원주, 강원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