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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世紀銘文白磁를 통해 본 官窯의 運營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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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世紀銘文白磁를 통해 본 官窯의 運營時期
  • -生産ㆍ消費遺蹟出土品을 中心으로-
저자명
김경중(Kyongjoong Kim)
간행물명
한국고고학보KCI
권/호정보
2010년|77권 (통권77호)|pp.165-190 (26 pages)
발행정보
한국고고학회|한국
파일정보
정기간행물|KOR|
PDF텍스트(1.78MB)
주제분야
인문학
서지반출

국문초록

조선시대 백자(白磁)를 연구하는 데 있어 17세기는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시대 사회·문화·경제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고, 이러한 변화는 백자생산에도 영향을 미쳐 17세기 백자에서는 15~16세기와는 다른 양상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관요(官窯)는 관요터에서 출토된 자료 및 문헌에 기록된 관요 이설시기 등의 비교를 통해 대략적인 운영기간을 설정하였다. 하지만 송정동 5호·6호 가마터 출토 자료와 경기도자박물관 소장 김영훈 기증유물, 그리고 도성 안 소비유적에서 출토된 17세기 명문백자의 비교·분석을 통해 17세기 관요 운영시기 설정에 오류가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먼저 관요의 운영시기와 관련해서 학동리 1613~1617년, 상림리 1618~1625년, 1628~1636년, 그리고 용인시 모현면 왕산리에서 1626~1627년까지 운영한 것으로 확인하였다. 또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선동리와 송정동의 경우, 기존자료와 신자료에서 확인된 명문의 비교를 통해 선동리는 1640~1648년, 송정동은 1649~1654년까지 운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유사리는 기존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1655~1664년까지 10년간 운영되었으며, 신대리 1665~1676년, 지월리는 1677년 이후부터 왕실 및 중앙관청에서 사용하는 백자를 생산하였다. 이 외에도 상림리와 선동리의 하한이 1636년과 1648년으로 밝혀짐에 따라 상림리와 선동리, 선동리와 송정동 관요 이설에 따른 운영의 중복시기는 없었다. 다음으로 숫자의 의미와 관련된 해석상의 문제이다. 숫자는 현재까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번조할 수량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날짜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初’와‘閏’字가 숫자와 같이 음각된 백자가 송정동, 신대리 등의 생산유적뿐만 아니라 소비유적에서도 출토되었다. 즉‘乙卯閏五十八’은 을묘년(1675) 윤5월 18일을,‘五初三壬􆪕’은 임진년(1652) 5월 초삼일을 의미한다. 또한‘左’·‘右’만 단독으로 음각된 백자가 1640~1648년까지 운영된 선동리 관요뿐만 아니라 송정동 5호·6호 가마터에서도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철화안료로 굽 안바닥에‘別’과‘左’, 간지(干支) 등이 쓰여진 백자편도 수습되는 점으로 보아 음각 이외의 방법으로도 명문이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가마터에 따라 굽 안바닥에 쓰여진 명문이 변화하기는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백자 번조가 순탄치 못한 상황에서 제작된 백자의 품질 저하방지 및 분실 방지 등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명문을 새기고자 했던 의도는 변하지 않았다.

국문초록

조선시대 백자(白磁)를 연구하는 데 있어 17세기는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시대 사회·문화·경제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고, 이러한 변화는 백자생산에도 영향을 미쳐 17세기 백자에서는 15~16세기와는 다른 양상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관요(官窯)는 관요터에서 출토된 자료 및 문헌에 기록된 관요 이설시기 등의 비교를 통해 대략적인 운영기간을 설정하였다. 하지만 송정동 5호·6호 가마터 출토 자료와 경기도자박물관 소장 김영훈 기증유물, 그리고 도성 안 소비유적에서 출토된 17세기 명문백자의 비교·분석을 통해 17세기 관요 운영시기 설정에 오류가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먼저 관요의 운영시기와 관련해서 학동리 1613~1617년, 상림리 1618~1625년, 1628~1636년, 그리고 용인시 모현면 왕산리에서 1626~1627년까지 운영한 것으로 확인하였다. 또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선동리와 송정동의 경우, 기존자료와 신자료에서 확인된 명문의 비교를 통해 선동리는 1640~1648년, 송정동은 1649~1654년까지 운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유사리는 기존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1655~1664년까지 10년간 운영되었으며, 신대리 1665~1676년, 지월리는 1677년 이후부터 왕실 및 중앙관청에서 사용하는 백자를 생산하였다. 이 외에도 상림리와 선동리의 하한이 1636년과 1648년으로 밝혀짐에 따라 상림리와 선동리, 선동리와 송정동 관요 이설에 따른 운영의 중복시기는 없었다. 다음으로 숫자의 의미와 관련된 해석상의 문제이다. 숫자는 현재까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번조할 수량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날짜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初’와‘閏’字가 숫자와 같이 음각된 백자가 송정동, 신대리 등의 생산유적뿐만 아니라 소비유적에서도 출토되었다. 즉‘乙卯閏五十八’은 을묘년(1675) 윤5월 18일을,‘五初三壬􆪕’은 임진년(1652) 5월 초삼일을 의미한다. 또한‘左’·‘右’만 단독으로 음각된 백자가 1640~1648년까지 운영된 선동리 관요뿐만 아니라 송정동 5호·6호 가마터에서도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철화안료로 굽 안바닥에‘別’과‘左’, 간지(干支) 등이 쓰여진 백자편도 수습되는 점으로 보아 음각 이외의 방법으로도 명문이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가마터에 따라 굽 안바닥에 쓰여진 명문이 변화하기는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백자 번조가 순탄치 못한 상황에서 제작된 백자의 품질 저하방지 및 분실 방지 등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명문을 새기고자 했던 의도는 변하지 않았다.

목차

Ⅰ. 머리말 Ⅱ. 17世紀官窯硏究現況 Ⅲ. 17世紀銘文白磁의 再檢討 Ⅳ. 銘文으로 본 官窯의 運營과 特徵 Ⅴ. 17世紀銘文白磁出土消費遺蹟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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